朝鮮通信使硏究 Vol.31 No. pp.49-95
朝鮮信使大坂易地聘礼交渉と対馬藩
Key Words : Diplomatic envoys,Tongsinsa,Tsushima,Diplomacy,Interpreter
Abstract
에도 막부(幕府) 말기 통상관계를 기축으로 외교 관계를 서구 각국과 수립하기에 이르기까지 근세 일본이 정식으로 국교를 유지 한 외국은 조선왕조뿐이었다. 그 외교교섭은 막부가 아닌 지리적 으로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쓰시마번이 담당했다. 도 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으로 단절된 조일 국교는 17세기 초 에 회복됐다. 조선왕조는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에 이어서 통신사(通信使)라고 불리는 외교사절을 일본으로 파견했고, 막부 말기에 이르기까지 조일 간의 ‘평화'롭고 안정적인 관계가 지속하 였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하는 통신사는 11대 쇼군[將軍] 도쿠가 와 이에나리[德川家齊]의 습직 축하를 명목으로 하는 1811년의 이른바 신미통신사(辛未通信使)가 마지막이 되었다. 막부가 위치한 에도까지 파견한 것은 1763~1764년의 계미통신사(癸未通信使) 이래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요인으로는 막부의 재정난과 막부의 대 조선 정책 변화, 조선멸시관의 대두 등이 지금까지 거 론되어왔다. 조선 측도 마찬가지로 통신사에 의한 재정부담을 주 축으로, 파견의 의의가 저하된 것 등을 통해 설명되어 왔다. 그렇 기 때문에 통신사가 단절되는 등 양국에 있어 조일 관계가 서서히 중요시되지 않게 되었고, 그 후 일본의 막부 말기 유신을 거치면 서 조일 관계는 단숨에 ‘지배'의 역사로 향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 도 한다. 본 논문에서는, 최종적으로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양국 사이에서 계획하고 있던 ‘13번째 통신사'에 대해 다루기로 한다. 양국에 있 어서 통신사는 결코 폐지된 것이 아니었으며,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가 새롭게 쇼군 직을 습직했을 때도 그때까지 와 마찬가지로 통신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역지통신 교섭을 제 재로 삼아 ‘양국의 서로에 대한 관심이 저하됐다'고 여겨지는 시기 의 조일 관계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위와 같이 계획의 경위는 밝혀졌지만, 통신사의 제도 개혁이라 는 외교 사안이 양국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논의되었는지에 대해 서는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다. 장소가 쓰시마로 변경된 신미통신 사는 교섭의 개시에서 그 실현까지 24년을 필요로 했으며, 양국 간의 제도 변경은 양국 간의 중대사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왜관에서의 실제 교섭과 이에 대한 쓰시마번과 막부 사이에 이루 어진 지시와 보고를 살펴보면서, 조선, 쓰시마, 막부 사이에서 다 음 통신사가 어떻게 계획되고 있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전반 조일 관계의 모습을 밝히도록 했다. 1811년 이후의 통신사는 막부의 에도성 혼마루[本丸] 및 니시 노마루[西丸] 화재와 일본 국내의 흉작, 혹은 조선 측의 재정난 등을 이유로 여러 차례 연기가 반복되어 실현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양국의 교섭이 계속되고 있었다. 수차례의 교섭에도 불구하고 내빙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근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조일 양국 모두 외교사절을 폐지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서구열강이 양 국에 접근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는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