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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通信使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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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通信使硏究 Vol.39 No. pp.61-100
근대 일본 문헌 속의 정몽주
김준배 해군사관학교 제2외국어학과 부교수
Key Words : Jeong Mong-ju,Imagawa Ryoshun,Modern Japanese Literature,dispatched to Japan,Poeunjip

Abstract

정몽주(鄭夢周)는 1377년 9월, 왜구에 의한 고려의 피해가 심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정몽주는 약 7개월간 일본에 체재하면서 규슈탄다이[九州探題] 이마가와 사다요[今川貞世] 및 일본인들과 교류하고, 교린관계의 이해를 절실하게 설명하여 금적(禁賊)을 요구하였으며, 이에 포로 수백 명을 귀국시키는 등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고려에 복귀하였다. 그는 일본 체재 중 일본인들과 감정적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그의 활동은 후대 조선통신사들에게 있어 모범적인 교린의 사례로서 수차례 칭송받았다. 뿐만 아니라 정몽주가 일본과 우호적인 교류를 한 사실은 전근대에 이미 『본조통감(本朝通鑑)』 등을 통해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알려져 있어서,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은 조선통신사와의 교류 중에 정몽주의 죽음에 대해 묻기도 했다. 일본이 근대 시기에 접어들자, 정몽주는 수많은 일본 문헌에 기술되었고, 전근대보다 더욱 다양한 측면에서 기록되었다. 외교관이자 일본과의 교류자로서 그는 일본인들과 학문적 교류뿐 아니라 서로의 풍속을 이해하는 깊은 교감을 경험했고, 이를 통해 일본인들은 그에 대해 칭송하며 한일융화의 상징으로 평가받게 된다. 유학자이자 학자로서 그는 뛰어난 업적을 남기어 ‘고려 제일의 인물'으로 평가받게 되었으며, 그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 또한 대단히 귀하게 여겨지게 된다. 고려의 충신이자 비극적 죽음으로 맞이한 인물로서 그는 많은 일본인들의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가 죽음을 맞이한 선죽교(善竹橋)는 일본인 조문객의 방문을 받게 되었고, 그에 관한 전설은 다양한 일본 문헌에 기록이 남게 되었다. 이처럼 근대 일본에서 정몽주는 한일융화의 상징이자 문학자로서, 충신으로서 일본 사회에 널리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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