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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通信使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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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通信使硏究 Vol.40 No. pp.1-42
회답겸쇄환사 접대와 의례에 대한 연구 - 조선과 대마도에서의 사례를 중심으로
심민정 부경대학교 해양인문학연구소 인문학술연구교수
Key Words : Hoedapgyeom-Soehwansa(Envoys dispatched for delivering the reply and repatriating the people captured),Tongsinsa(Joseon Envoys to Japan),Send-off Banquet,Tsushima,Baesu-Yaejo-Seogye(Ceremony of receiving the royal letter and gifts sent by the Ministry of Rites)

Abstract

본고에는 회답겸쇄환사에 대한 조선과 대마도의 접대를 살펴 보았다. 회답겸쇄환사에 대한 자료는 임진전쟁 후 통신사 관련 규 정이나 제도들이 정비되어 가는 과정을 잘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 서 의미가 있다. 회답겸쇄환사 시기의 조선, 그리고 대마도에서 행 해진 접대와 의례를 살펴본 결과 통신사 관련 규정이 완비된 17 세기 말과는 다른 차이점들이 확인되었다. 그 특징은, 첫째 조선에 서의 공식적인 전별연이 행해졌던 지역의 차이가 있었다. 이는 차 츰 정비되어 영천, 안동, 경주, 부산이 전별연 장소로 확정되어갔 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는 영천과 안동으로 다시 축소되었다. 둘째, 부산 지역에서 행해진 전별연과 사연에서는 경상좌수사의 역할이 동래부사보다 컸다는 점, 경상우수영의 역할도 있었다는 점도 특징 중의 하나이다. 통신사선의 제작 및 이동 등에 수군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후 차츰 동래 부사와 부산첨사의 역할과 비중도 커지게 되었다. 셋째, 회답겸쇄환사 시기 영가대에서 해신제가 행해진 것을 확 정할 수 있는 시기는 1624년 사행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영가 대의 조성이 1614년이지만 1617년 회답겸쇄환사의 경우 해신제 를 어디에서 지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영가대에서 제의가 치 러졌는지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607년 사행 때에는 해안 에서 진행되었으며, 1624년 사행의 경우, 해신제가 영가대에서 행 해졌다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다. 넷째, 회답겸쇄환사에 대한 일본의 접대와 의례를 대마도의 사 례로 한정해 보았을 때 대마도에서의 하정(下程)과 연회는 공식적 으로 정해진 수 보다 많고 융숭했다. 또한 횟수가 거듭될수록 사 신들의 사관 등에 대한 준비가 충실해졌다. 그리고 의례의 측면에 서 볼 때, 전별연의 절차나 형식도 정비되어 갔으며, 예조의 서폐 를 받는 의례와 상견례가 동시에 진행되던 것이 통신사행부터는 별도로 분리해 진행하게 되었다. 또한 예조의 서계와 예물을 받는 대마도인 중 조선에서 직책을 준 수직인(受職人)이 포함되어 있었 다는 점은 당시 회답겸쇄환사가 통신사의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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